[깨달으로 가는 쉬운 순서 혹은 쉬운 방법 & Now What?]
초기 정의에서: 깨달음이란.
나와 대상, 나와 세상, 나와 사건, 혹은 세상사 모든 일에 대한 분별심이 없는 상태의 해탈
그래서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열반이 있는 상태를 "깨달았다"라고 정의한다면,
깨달음의 과정으로 가는 데에는 순서가 있을까. 현자나 각자의 말을 종합해서 음미해 보자면, 일단 명상을 제시한다. 명상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조용한 곳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하는 명상을 선정한다.
1. 생각 끊기 명상
모든 생각 자체를 끊을 수 있다면 최고라고 한다. 어쩌면 지혜를 알려는 마음조차 그 끊어야 할 생각의 대상이 된다.
2. 생각생성의 메커니즘 관찰
생각 자체를 끊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생각이 생기는 것을 관찰하라고 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냥 그 생각만을 쭈욱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다른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3. 생각 중에서 한 가지 주제를 정하라고 한다.
생각이 줄기가 많고, 서로의 주제를 방해하니, 한 가지 주제를 정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러면 샛길로 빠지는 일이 줄어든다고 한다. 명상을 하나의 문장이나 키워드로 적어놓고 그 생각만 하는 것이다. 생각을 아예 안 할 수 있다면, 1번에서 최고라고 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4. 생각을 객관화 시키기
2번과 3번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물끄러미 남이 되어 관찰을 해 보라고 한다. 내 생각을 내가 음미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공감하고 비판하고 비평을 하는 것처럼. 또한 한 주제의 생각에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어디로 번지나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도 좋다고 한다.
5. 하나만 읊조리기
생각이 싫은 사람도 많다. 생각이 넓거나 깊지 않아서 사고가 힘든 사람도 많다. 혹은 삶의 고단함에 이제 생각이라는 기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엔 한 문장을 반복하여 계속 소리 내어 말하는 것도 좋다. 관세음보살도 좋고 나무아미타불도 좋고,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로 시작하는 것도 좋다.
결론적으로, 1번부터가 아니라 6번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따라가는 것보다 6번처럼 하는 것이 명상에는 더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신경계는 신기한 메커니즘이라 하나만 읊조리면 그 길만 활성화되고 나머지 길은 쉬게 된다. 그것이 명상의 기본인 것이다. 그 한 길마저 끊기면 1번의 상태가 되고 명상이 성공하는 것이다.
초기의 깨달음과 명상은 이렇게 오해를 받았다. 완전히 들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수상한 것은 명상을 하는 순간엔 깨달은 자가 되었다가, 거두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 깨달음과 현실 생활에서의 괴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진정 깨달았다면 그것이 일치해야 하지 않은가, 이론적으로. 그래서, 자주 명상을 하라고 한다. 그 시간이 길수록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고 그들은 해석한다.
다시 깨달음의 정의로 가 보자. 광의의 깨달음의 정의가 있다.
앞에서는 해탈과 열반을 키워드로 설명했다만,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서, 세상의 존재이치를 이해하여 순수의식 속으로의 진입"을 말한다. 그래서 순수의식과 나 라는 존재사이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
순수의식/무아(참나/진나보다는 붓다는 무아를 선호한다고 한다. 붓다는. 참나와 진나는 뭔가 있다는 느낌을 주니까 혼돈이 생긴다는 것이다)에 이르면 번뇌와 분별은 저절로 없어져 있다. 이미 의미 없는 생각이고 상태인 것이다. 순수의식을 알았다는 것은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입자과 파동의 관계를 알았다는 것이며, 역경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활동을 알았다는 것이 된다. 또한 서양 철학에서 다루는 존재나 인식론의 한계를 알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깨달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저절로 명상에 가 있다.
저절로 해탈에 가 있다.
저절로 열반의 상태다.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
나를 포함한 포함한 존재(세계)의 실상을 안다.
를 점검해 보면 된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당신은"깨달은 사람"이라고 평가 내려도 되겠다.
결론적으로 생각해 볼 것은
나의 판단으로, 명상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들다.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 동양에서 말하는 지혜, 서양에서 말하는 로고스 등을 통해 지적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한다. 혹은 그것이 경험을 통해서 오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쩌면 더 행운일 수 있겠다. 배움의 길은 힘들고 고독하니 말이다. 그래서 스승과 동행자가 필요 한 지도 모른다.
명상을 통해, 깨달았다면, 다시 지구로 왜 돌아오는가. 그 명상 상태로 바로 지구를 떠나도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우리가 돌아오는 이유는 지구에서 이번 생에서 할 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할 일이 우리를 잡는다. 깨달았다는 사람들조차도 잡는다. 업과 인연과 미련? 아직 덜 깨달아서? 덜 깨달은 것도 깨달은 것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인가? 왜 돌아와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하다. 왜?
오고감에 걸림이 없는 상태가 되어 자유자재로 그 이동과 변화를 즐기며 행하며 그 모든 것을 관망 가능한 앎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에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것. 아마도 윤회는 하지 않으리라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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