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바치지만 세상은 버리는 도도함]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멀리 서 온 가족들을 떠나 보내고 자리에 않으니 부고가 날아든다. 우리 정도 나이면 이제 부모들의 부고도 자연스럽다. 부모님들의 부고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나면 이제 자녀들의 결혼 소식이 날아들게다. 다만 요즘은 결혼이 늦거나 아예 하지 않으려하니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부고는 사정이 다르다. 결혼은 선택이 되고 말았지만 죽음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니 부고는 언제든지 날아들게다.
부모 세대는 소극적이고 자기 비하에 익숙했다. 어릴 적부터 정여사를 비롯한 그 세대 사람들의 언어 사용에 전설은 반감이 많았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늘"세금을 바친다"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정여사는 일제강점기를 살기는 했으나 조선시대를 살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 세대 어른들은 나라에 귀속된 하인 느낌의 이런 용어에 익숙했다. 나랏님인 왕이 있고, 그 왕을 떠받들어 모시는 날들에 사용했던 용어들이 아닌가.
우리는 왕조시대에 살지도 않거니와 "국가"라는 현대적 개념에 우리가 모셔야 할 대상은 없다. 세금을 내는 나 자신이 국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여사 세대는 그 경계를 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여사 세대가, 다시 말하면 국가에 세금을 바치던 굴욕적 삶에 도도하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수동적이고 아래의 삶을 살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을 표현을 할 때는 그렇게 도도할 수가 없다.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없다.
ooo가 세상을 버렸다.!!!
그들은 감히 세상을 버릴 줄 알았던 것이다. 비록 세금은 무릅꿇고 바치는 신세였을지 몰라도 죽는 그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버릴 줄 알았던 것이다. 아니면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는 위로의 표현이었을까?
죽은 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건 살아있는 이들이 자신들을 위로했건 "세상을 버리는 그들"은 승리자다. 적극적으로 삶에 임한 자들이다. 보기에 굴욕적인 순간이 있었을지라도 그 마지막엔 도도하게 새상을 버릴 줄 알았던 사람들.
전설은 다짐한다.죽음으로 지구와 이별하는 그 날에도 도도하고 당당하게 지구를 버릴 것이고, 또한 살아 있는 매 순간에도 고고하고 도도하게 지구와 마주할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고 해 두자. 모든 인간에게서 배울 게 있다. 세금은 바쳤으나 세상 정도는 버릴 줄 알았던 세대. 자유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에 적극적이고 도도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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