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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보다 더 가벼울 수는 없다: a very simple Thought on heavy Topics
SERENDIPITY/TRIP domestic

진주성과 촉석루 240604

by 전설s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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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과 촉석루 240604]


진주성 메인케이트



여수에서 윈포인트 여행을 마치고 바로 귀가  가려다가 진주성을 들렀다 가기로 한다. 이왕에 이 방향이니 다시 시간 내는 것보다 한명한 일이다.


왜 진주성인가?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저지선이었던 진주성.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변했을 것이었던 그 진주대첩의 현장!!!


남명 조식은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때는 조선 선조!!! 임진왜란에 재임했던 임금이다. 조식은 임진왜란 전에 사망했다.


조식은 마을 가짐을 바르게 하고,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실행하자는 경의사상을 주장하였다는데, 이는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옳다고 믿는 가치는   민본 즉 백성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니 선조의 출사를 어찌 거절하지 않으리!!!


조식의 이런 영향력으로 이때부터 사람들은 출사를 하지 않아도 백성을 위할 수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재야에서 백성과 함께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의병이 대거 출현하는데 사상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해석이 있다.


진주대첩은 그런 의병들의 노고에 힘입은 바, 일개 한 시민으로서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함을 느끼려고 진주성으로 길을 잡았다.




터미널에서 버스로 4 정거장인데 버스 승강장이 안 보여, 어르신에게 여쭈니,

뜨악한 얼굴로 어이없어하면서 말씀하신다.

똑바로 10분만 걸어가면 진주성이 나오는데 말이지.

아. 예!!!

걷는 길의 좌측으로 진주대첩 광장이 조성 중이다. 조성을 시작하다가 유적이 발견되는 바람에 그 발굴을  하느라고 공사가 길어졌다고 한다.






벌써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의 시대 간격으로 층층이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이탈리아 터키 유적 발굴 못지않게 우리나라도 참으로 역사가 깊다는 것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공사벽에 이런 정보를 알려 놓다니 고마운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날 수도 있었을 것을 역사를 음미하겨 지나가게 해 준다.






새삼 버스 타지 말고 걸어라 제안해 준 어르신도 고맙다. 진주대첩이 진주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 나아가서 지금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니, 광장 조성을 한 것이겠다. 그것을 기리는 광장을 만드는 현장을 지나가게 하시다니.


어르신은 진주성 정문보다 촉석루로 바로 가는 것도 좋겠다 하셔서 촉석루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지휘소로 평시에는 휴게장소로 사용이 되었다니 멀티플 플레이스였나 보다. 이 바로 옆에 논개가 일본 장수를 안고 몸을 던졌다는 바위가 있다 의함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때부터 진주성이 조성되고 시대를 달리하며 개축 증축 되었을 것이나 저 의암은 옛부터 있었으되 이름만 확실히 논개 이후에 명명되었을 게다.


진주성은 누가 뭐래도 진주대첩을 중심으로 의인 충신을 기리는 유물로 조성되어 있다.



논개/김시민/이름 모를 의병/승병
의 영역으로 대충 나누어 볼 수도 있겠다.






논개가 활용한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길이다. 깊이가 있고 가파르니 주의하란다. 이래저래 주의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주 단아한 모양의 암석이다. 세월이 4백 년도 더 흘렀건만 아직도 암석이다. 4백 년의 비바람을 생각하면 저보다 조금은 더 컸을까?





촉석루 기단과 기둥은 새로 단장해서 세월의 흔적이 없지만 마룻바닥의 아랫면인 저 기둥 윗면의 나무는 그대로 일 터이다.




전시와 평시에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촉석루의 널찍함에 앉아서 남강 바람을 맞아 본다. 전시의 장군의 마음으로, 평시의 아낙의 마음으로!!!





사당에 놓인 논개 언니의 초상이다. 의인의 풍모도 있지만 참 아름다운 여인이다. 일본 장수 하나일지 모르나 전쟁은 기합의 싸움이 아니겠는가.


일본에서는 무사 외에는 싸우질 않는데, 조선은 아낙 승려 농민 그리고 학자들까지 싸움에 나서서 일본인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 않는가.


여자에 기녀가 일본 장수를 수장시키는 조선이라니.





진주성은 사방 벽이 다 복원되어 살아 있어서 쭈욱 따라 걸으면 성 전체를 볼 수 있다. 싸움에 대한 기억이 강하다 보니 성벽 따라 총포가 설치된 몇 곳도 복원되어 있다.





왜란 때 주로 사용되었던 세 가지 대포가 바깥에 전시되기도 하고 누각 안에 나란히 두기도 했다.
총포의 설명도 친절하게 되어 있다. 남성분들은 더 자세히 보면 좋겠다.





서쪽과 북쪽에는 장군들이 전쟁을 지휘하던 지휘소가 서 있다. 서장대와 북장대가 남아있다.



북장대

서장대.



승병들은 이 절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했다고 추정한다. 사찰 유적이 발견되어 그렇게 추정하고 그 절터에 절을 조성하여 승병을 기린다고 한다. 승병을 기리는 호국사이다.






호국사 옆에 창렬사라고 나란히 있다. 왜 절이 연거푸 있나 싶지만, 호국사는 절이고 창렬사는 임진왜란 전사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한글 읽기만 같아서 생기는 오해다.





계단을 꾸역꾸역 오르면 입구가 나온다. 창렬사 입구다.





건물이 3 채다.  중앙에 신위가 9기, 좌 우 사당에 각각 14기  16기. 39기라 했는데, 숫자가 헷갈린다. 여하한 위패가 현란함 없이 딱 패만 가지런히 줄을 서 있다.






방명록이 놓여 있어서 나도 감사함을 남겼다.



진주대첩을 이끌었던 김시민 장군의 기념비석은 수리 중이었다.





왼쪽이 수리 중인 김시민 공적비!!!


위에 열거한 논개/승병/김시민/의인
외의 순국선열들은 여기에 있다 1987년 조성이 되었다고 하니, 4백 년이 흐르고 그 혼백이 모여서 회포를 풀었을까.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이런 유물과 유적지를 만난다.


성벽 걷기를 마무리하자.




남강이 없다면 이만한 높이로 어떻게 전쟁을? 양산을 옆에 가만히 놓아 보았다. 하기사 중국의 만리장성도 이 높이 정도밖에 안 된다만....



반쯤 돌고 벤치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을 걸었다.




사족으로, 이 아름다운 꽃들 꽃화분을 감상하자.





아름답다.
6월의 이 땡볕에 물을 주고 있는 이런 분이 없다면 이런 아름다운 꽃도 없다.


아래의 왼쪽 화분에 물을  주는 아저씨!!!


우리 삶의 곳곳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감사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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