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게: 생전 처음으로]
평생 그 말을 해 보았을까? 우리 정여사는.
평생 그 말을 들어보지 않았다는 나의 기억.
정여사는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줄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다정하지는 않다. 다정한 말, 뻔하지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감정은 결코 내보이는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감정은 보여도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인데 우리 정여사는 그 반대였다.
내가 여행을 갔다가 올 때쯤 전화를 하면, 그래 천천히 오너라!라는 표현은 하였다. 심지어 장거리 여행에 한 달 이상을 여행을 다녀도, 즐겁게 신나게 돌아다녀라!라는 말은 했지만, 걱정하는 말이나 기다리니 어서 오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기뻐도 슬퍼도 속으로 완벽하게 삭히는 사람이었다. 정여사가 평생 동안, 남편 일찍 보내고 자식 셋을 거두어 키우시면서 우는 것을 한 번 보았다. 별로 슬픔도 없는 분이었다. 차라리 늘 흥이 많은 긍정적인 분이셨다.
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신지 4개월 만에 감정을 드러내는 말씀을 하신다. 방문을 하는 날 아침 전화에서,
오늘 엄마 보는 날이에요. 2시에 갈 테니까 점심 3숟가락 더 드시고 예쁘게 하고 계세요!!!!
응. 기다릴게!!!!
보통은 응!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기다릴게 라는 말을 더 듣는다. 평생 처음 들어 본 말이다. 정여사도 평생 처음 해 본 말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보고 싶은 자식이라서... 아니 자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매일 전화를 두 세번씩 해도, 그 내용은 절대로 기억되지 않는다. 단기 기억 처리 장치에 장애가 있는 치매초기라서 그렇다. 그러니 전화는 찰나의 위로가 될 뿐이라는 뜻이다. 물론 얼굴을 보는 그 10분도 결국은 10분의 행복일 뿐이지만, 지금은 그 찰나의 행복이 정여사의 전부이다. 그런데 뇌의 회로에서 [기다릴게]라는 말을 하도록 허용하는 그 순간에 나는 울컥하는 것이다.
서로
처음 그 말을 해 놓고
처음 그 말을 듣고서
정여사는 그 말을 잊고 나는 그 말에 눈이 젖는 것이다.
예!!!! 기다리세요 정여사님. 제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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