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멍 때리는 시간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
엄마가 혹은 아빠가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자녀 양육에만 열정을 불태우는 경우가 있다. 굳이 열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양육에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대학 진학을 하면서 독립해 버리면 엄마는 혹은 아빠는 할 일이 없어진다. 드러난 열정이건 조용한 열정이건 그 열정을 쏟을 대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쩌다가 갱년기나 집안의 슬픈 대소사와 겹치게 되면 그는 혹은 그녀는 우울함이라는 감정도 만나게 된다. 우울함을 만나기 전에 "할 일이 하나도 없는 시간"을 먼저 만나게 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멍 때리는 시간들을 관리해야 할 순간도 맞닥뜨린다.
자녀 양육이 아니라 부모를 모시는 경우도 그렇지 않을까? 지병을 앓는 부모를 모시다가 그 부모가 요양병원으로 모셔지거나 사별이라도 하게 되면 그 보호자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을까. 정여사를 중심으로 살았던 전설의 삶에도 그런 시간이 왔다. 정여사가 집에 없으니 할 일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정여사의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졌었나? 그토록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음에도 하루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있었던 것일까?
할 일이 하나도 없는 날들. 멍 때리기가 이렇게 편안한 활동인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고요 속에 머무는 시간을 늘린다. 그래서 멍 때리는 순간을 누렸으면 더 훌륭하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태를 즐길 수도 있다.
서가에는 많은 책이 있다. 한 번 이상을 읽은 책도 있지만, 아직 시작 못한 책도 몇 권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컴퓨터 외장하드에는 다음에 한 번 더 볼 영상들이 기다린다. 또한 넷플릭스에는 볼거리들이 있고 유튜브에도 봐야 할 그래서 공부할 만한 재밌는 다큐가 많다. So what? 너희들은 이제 유혹적이지 않다. 언제든 할 수 있기에 유혹적이지 않다.
마음과 몸을 휘감았던 체인이 느슨해져서 이제 몸도 움직일 수 있다. 집을 떠날 수도 있다. 뇌의 여행이 아니라 몸의 여행. 시간이동뿐만 아니라 공간 이동도 선택하기만 하면 될 순간이 왔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더 이상 유혹적이지 않다. 언제든 할 수 있기에 유혹적이지 않다.
이미 많이 다녀 본 세계 여행, 이미 읽은 책들. 이미 본 영화들과 드라마들 그리고 다큐들. 이미 아는 철학적 과학적 역사적 지식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내 삶은 풍족하다. 그 추억만 음미해도 남은 날들이 행복할 것도 눈치채었다. 그래서 멍 때리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다.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가 너무 좋다. 다만, 이 감정들 초차도 병원에 잘 적응한 정여사 덕분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 이 것이 어쩌면 제일 큰 이유였을까. 멍 때리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의 2월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생애 첫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은 2022년 88세 정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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