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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MEDITATION & books

분재를 다시 생각한다

by 전설s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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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를 다시 생각한다]

 

 

 

분재는 인간의 손길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나로서는 (사진은 pixabay에서)

 

 

친구들이 정원을 가꾸고 집을 짓고 하다 보니 가드닝이 화제가 된다. 그러다 보니 기억 한 편으로 미루어 둔 "분재" 생각이 났다. 분재라는 것이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작으면서 자연의 웅장함이 느껴진다는 놀라움이고, 두 번째는 큰 자연을 축소시켰다는 그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부자연하게 느껴졌기에 그러하다.

 

분재에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랑 함께 관람간 그 분재 전시회는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나무의 고통이 오기도 하고 부자연함이, 관람하는 즐거움을 너무 압도하기에 즐기기가 힘들었다. 

 

집안에 화초나 나무를 키우는 사람이 많다. 잘 키우는 사람도 많다. 놀랍기도 하면서 부러웠다. 우리 집에 온 화초와 나물들은 잘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 정여사는 잘 키운다. 전설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한두 번 겪고 나니 키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전에도 화분 안의 화초와 나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산에 있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나무와 화초만이 좋았다. 나의 관심이 없이도 스스로 존재 이유로 존재하는 그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화분에 자라는 것은 나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분의 화초와 나무를 용인한다면 분재를 용인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시점이 다시 온 것이다. 그렇다고 그 화분들이 나에게 와서 싱싱하게 자라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분재란 무엇인가. 스스로 조사한 바를 요약하자면,

 

"대자연을 그대로 옮겨오는 작업이며, 큰 것에서 작은 것에로의 창조가 요구되는 예술적 활동"

 

멋지게 최대한 긍적적으로 받아들인 분재의 정의가 이러하다. 그냥 "나무를 미니로 화분에서 키우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dwarf tree

 

 

 

 

위 사진의 나무는 분재나무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위치를 잘 잡고 카메라로 담으면 마치 분재가 아니라 자연에 있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 난다. 이 것은 사진의 미학이고. 분재의 미학은 그 안에 깔려 있다. 똑같은 분재이지만 아래 사진에서는 자연의 웅장함이 있지만 분재라는 "고의"와 "인위"를 삼키며 눈으로 즐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사진은 둘 다 pixabay에서)

 

 

 

 

문헌에 의하면 고려중기쯤부터 분재작품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시대까지 가는 문헌도 가끔 있나 본데 고려는 되어야 분재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듯하다. 

 

분재는 관상이 목적인데 소나무처럼 나무를 보거나, 매화처럼 꽃을 보거나, 석류 등의 열매를 보는 경우, 또 단풍나무처럼 잎을 보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원리를 모르겠다. 지금처럼 분자유전학을 이용하지도 않겠고, 새 품종 개발처럼 식물유전자를  이용하거나 접을 붙이는 것도 아닌 듯하고. 원리가 상상이 되지 않아서 더욱더 마음이 불편한 것이다. 

 

정의도 알겠고 목적도 알겠고 종류도 알겠다만. 줄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내거나 모양을 잡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애초에 큰 것을 적게 하는데, 분자유전학적 방법 외에 무엇이 있을까?

 

성장을 조절한다고 한다. 성장억제제와 성장촉진제를 사용하고, 모양은 철사나 도구를 이용하여 잡는다고 한다. 식물의 생장 생리를 정확하게 터득한 사람이 각종 약제와 도구를 사용하여 만들어 내는 (좋게 말해서 창조해 내는) 것이 분재라는 것이다. 

 

모든 예술의 창작 활동에서 당사자 즉 예술가가 고통속에서 생산해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즐거움 속에 만들면 더 좋겠지만 고통을 끓여서 만든 작품이 많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작품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분재는 그 대상을 너무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불편함의 원인인 것이다. 분재 만드는 법을 정확하게 알기 전부터도 불편했던 마음이 "키우는 법"이 아니라 "만드는 법'을 맛보고 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분재여!

너는 왜 탄생해야 했던가?

나무를 고통으로 인도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작은 웅장한 자연이 탄생해야 했을까. 예술가는 분재가 최선이었을까?

 

거대한 식물 정원이 있다. 좀 작아도 좋다. 심지어 아파트 베란다의 화분에서 자라는 화초와 꽃나무도 인간의 손길로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것은 조금이고 자연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 그러나 분재의 탄생과정은 불편하다. 아름답기는 하건만. 

 

미를 추구함에도

예술적 창작활동임에도 

분재에 대한 조사를 했음에도 

전설은

오늘도 분재예술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을 못하고 있다. 이해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슬픈 단풍. 나의 입장으로는 그러하다. (사진출처:pixabay)

 

 

[플러스]

화분의 화초와 나무를 수용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죽기 전에 분재의 예술도 수용 가능한 이유를 내가 찾을 수 있으리라. 이토록 부자연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전설. 자연과 부자연의 부동행. 도대체 전설이 자연과 부자연을 가르는 기준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것이 벌써 큰 철학적 화두이다. 언젠가 스스로 풀고 정의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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