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보다 더 가벼울 수는 없다: a very simple Thought on heavy Topics
SERENDIPITY/MEDITATION & books

반야심경 260자의 세계: 형이상학 그리고 인식론

by 전설s 2024. 7. 9.
반응형

[반야심경 260자의 세계: 형이상학]

 

2차 해설서로 선택했다. 아래에 1차 원문글도 기록했다.

 
 
불경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어서, 하나를 읽어보고자 하니 방대하다. 하여 가장 짧은 260자의 반야심경만 읽어보기로 했다. 반야심경은 대반야경 600 여권을 압축한 내용이라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일단 읽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라, 편집과 글이 내 적성과 비슷해 보이는 책을 한 권의 책을 골랐다. 이를테면 해석서이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썼다는 그 원문으로 접근할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만, 맛을 보는 데는 2차 해설서도 중요하다. 260 글자이니 언젠가는 한자로도 만날 볼 수도 있다. 한자를 내가 싫어하지 않으니 필사의 기회도 생길지도 모른다. 다만 미래에.
 
 
 

1차 반야심경 원문이다(블러거 원문거사의 글에서 옮김)

 
 
1차적으로 반야심경은 사리자라는 깨닫고 지혜가 많은 자가 중간에서 일반 신도들을 대신해서 질문을 하고 석가 혹은 관자재보살이 내미는 그 답을 전해 주는 형식을 취한다.
 
 
 
번뇌와 고통이 없는,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라고 하자. 무엇을 깨달을 것인지가 설명이 되어 있다. 참나를 알고, 그것은 온 우주에 있으면서 세상 모든 인간과 사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참나의 반대이고, 번뇌와 고통의 주체인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번뇌와 고통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있다. 그것은 뇌가 만들어 내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허상이라 하면,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시시각각 그 모습이 변하여 떡 꼬집에 실체를 논할 수 없는 대상을 말한다. 그 대상을 인식하는 나를 포함한다. 허상이라고 표현되는 그 대상은 인연으로 만들어진다. 인과 연 또한 시시각각 변화의 순간에 있으므로, 인연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도 정해짐이 없다. 정해짐이 없는데, 번뇌와 고통을 야기할 수는 없다. 
 
 
 
세상은 인연으로 생성되었고, 그 인연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인연으로 생긴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도 변화 중이고, 내 감각이 받아들이고, 가공해서 만들어 낸 생각, 생각의 결과로 이어지는 나의 행동들이 모두 실체가 없는 찰나의 것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번뇌와 고통으로 안고 살아갈 만큼 영원하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주의 기운에 합일하면, 굳이 "나"라는 경계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경계로 만들어진 나는 인연의 결과물인 세상을 고정으로 인식해서 번외와 고통만을 양산하는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삶에는 번뇌와 고통만이 있겠는가. 사랑 행복 평화 안식 등의 모든 긍정적인 감정과 가치들도 번뇌와 고통의 같은 생성 기전을 따른다. 이를테면 고통도 행복도 같은 메커니즘으로 생기고 소멸되는 인연의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그러하니, 굳이 우리를 그런 소용돌이 속에 둘 필요가 있는가. "나"라고 착각하는 이 경계를 허물면, 그 모든 것들을 영화처럼 볼 수 있는 제삼자가 될 수 있다. 영화를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으로 뛰어들진 않는다. 뛰어 들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삶은 영화에 감정이입을 한 채로 내가 영화 주인공인냥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영화의 관찰자이고, 영화가 다루는 각종 감정들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를 알고자, 읽은 반야심경에서 종교적 내용보다 형이상학적 인식론을 본다. 서양 철학에서 깊이 다루던 그 인식론의 각종 프레임들이 머리를 스친다. 그들도 반야심경을 읽었음이 틀림없다. 현장법사가 반야심경을 7세기에 적었지만 석가의 가르침은 기원적으로 거슬러간다. 실크로드로, 로마제국의 길로, 등등 그 많은 지식들이 유럽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새삼 철학의 인식론과 우주론을 다시 일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역경에서의 우주 탄생론도 합세해서, 복습을 하라고 부추긴다. 
 





또한 우주생성론의 결정체를 본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이는 무극에서 태극으로, 태극에서 음양으로, 모든 것은 음양의 밸런스로 운행되고 변화된다는 역경의 우주생성론과 맞닿아 잇는 듯하다. 무극에서 음양이 생성되었고, 음양은 결국 무극으로 되돌아가는 순환과 변화를 거치니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우주론과 만나게 되어있다. 여하한 우리 우주는 생성되었고, 인식론은 중요하다. 인식되지 않는 것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다만, 유형의 것만, 물질세계만 인식의 대상이었던 과거의 철학과 서양의 철학들이 이제 그 인식의 대상을 넓혔다는 것은 고무적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마지막이다. 석가모니의 마음이 보인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지만, 석가도, 불교에서도 혼자만의 성공을 기뻐하진 않는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이를 깨닫고 긍정도 부정도 굳이 없는 피안으로 가자고 한다. 카르마를 완전 소멸할 때까지 끝없이 윤회해야 하는 인간의 수고로움을 없애주고자 한다. 함께 그 윤화가 아예 없는 극락정토인 피안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 그 소망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후렴구로 넣어 놓은 반야심경. 대반야경 600여 권을 줄여서 260자의 반야심경을 만드는데, 함께 가자는 이 간단한 생각에 18나 할애를 하였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반야심경 현대어 변역을 이제야 본다(2014년 버전)

반야심경 현대어 변역을 이제야 본다(2014년 버전)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본을 이제야 본다 (2014년 버전)] 친구들 단체 카톡방에 반야심경 현대어판이 올라왔다. 출처를 찾아보니 도무지 없다. 어디선가 나와서 몇 년을 돌아다니는데 명확한 출처

serendipity-of-soul.tistory.com

 

 

사리자 그리고 사도 바울: 반야심경 읽다가 문득

사리자 그리고 사도 바울: 반야심경 읽다가 문득

[사리자와 사도 바울의 공통점: 반야심경 읽다가 문득]  신약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집필자 구술자 외에도 그 내용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다. 예수를 뒤 따르는 무리들이 주를

serendipity-of-soul.tistory.com

불경은 반야심경만 읽어보기로 하자

불경은 반야심경만 읽어보기로 하자

[불경은 반야심경만 읽어보기로 하자]반야심경을 펴 낸 이 책의 출판사가 요약해 놓은 글이다. 한 마디로 반야심경은: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260자 경전.대반야경 600여 권을

serendipity-of-soul.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