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니, 정여사가 크게 말한다.
이제 88세가 되었도다.
반가웠다. 아직 자신의 나이를 또렷하게 기억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작년부터 자식들의 나이 계산이 힘들어졌다. 계산은 뺄셈으로 하여야 하는데, 몇 년을 집에 계시다 보니 물건 살 일이 없으니, 산수를 활용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쇠약해진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약해지고 결국은 소실되는 것처럼, 뇌도 늙는다. 그래서 사용핮 않는 기능이나 생활에 그다지 소환되지 않는 기억이나 기능은 저절로 퇴화한다. 그래서 손발을 사용하는 악기를 배우라고 하고, 늘 공부를 하라고 의사들이 권한다. 뇌 활동을 정상적으로 유지시키는 데 매우 유효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정여사의 건망증도 깊어진다. 몇 해전에는 인지장애가 의심되어 치매검사를 했지만, 치매는 아니고 뇌기능약화였다. 이제 또 몇 해가 지났고, 이제는 건망증 증세를 확연히 알겠다. 늘 드시던 복용약을 잊고 안 드신 대단(?)한 실수를 두어 번 한 적은 있으나 생활상의 큰 실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정여사의 건망증을 보호자가 다 커버하고 있어서 덜 드러날 뿐이다.
약속이 늦게 끝난 어느 날. 귀가하니 새벽 1시쯤이다. 주무셔도 된다고 하고 외출하였건만 그녀는 기다린 것이었다.
그 이튿날 점심,
미안한 마음에 닭다리살 간장마늘 볶음을 하여, 각종 야채를 넣은 샐러드를 점심으로 준비를 했다.
그날 저녁,
정여사님, 우리 점심은 뭘 드셨을까요?
맨날 먹는 점심 메뉴를 기억하는 사람이 어딨어.....(변명을 항상 준비하심)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간간이 그녀의 기억 정도를 알기 위하여 질문을 하면 식사메뉴는 잘 기억을 못 하니.
혹시나 싶어 연달아 질문을 한다.
딸이 어젯밤에 몇 시에 들어왔는 지도 모르시겠군!!!
왜 몰라. 12시 넘어서 한참 넘어서 왔지.
88세이지만, 단기 기억 장애가 있지만, 건망증도 있지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정보는 저장하는 이 놀라움. 점심 메뉴 따위보다는 자신의 보호자의 움직임이 훨씬 중요하기에 정여사의 뇌는 적확하게 자기의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학교 다닐때, 공부가 그토록 어려웠던 것은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고 수중한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밥보다는 자식이 중요하니 기억을 하는 것.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자신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누구인가를 뇌는 정여사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세포의 경이로움, 뇌세포의 아름다운 활동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
'HERstory 우리 정여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두색 의자를 사랑해: 한글의 쉬움과 어려움 (0) | 2022.07.06 |
---|---|
지랄 맞은 선입견으로 억울한 정여사: 치매가 아니라니까 (0) | 2022.07.05 |
이보다 더 소박할 수는 없는 어버이날 만찬 (0) | 2022.05.08 |
몬스테라의 공간감각: 희한한 식물 세계 (0) | 2022.04.07 |
80세를 넘은 여자 어른들의 삶의 목적은 뭘까?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2) | 2022.03.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