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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DRAMAS & scenes

응어리 해소용일까 마지막 육박전: 잭 리처

by 전설s 202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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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어리 해소용일까 마지막 육박전: 잭 리처]

 

왜 마지막엔 총알이 있어도 육탄전을 할까?(사진출처:pixabay)

 

폭력이 없는 영화가 있을까. 멜로물 외에는 없지 않을까. 온갖 종류의 총이나 칼을 사용한 폭력에서부터 비행기 차들을 이용해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난무한다. 중국에서 유래한 몸을 이용한 각종 무술로 대결을 벌이는 것은 정당해 보이고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저 폭력에 사용되는 물건들이 무지막지해서 일 것이다. 

 

전쟁에서도 무기를 사용해 왔지만 항상 기초는 인간의 몸 그 자체다. 그 몸의 확장으로 총과 칼과 자동차와 헬기 비행기등이 사용되는 것이다. 보기에는 몸 만을 사용한 싸움만이 정당해 보인다. 나머지는 인간으로서 모두 굴욕적이다. 

 

영화 [킬 빌 시리즈]에서는 칼 예술의 적나라함이 폭력과 살상을 압도하는 미적 체계를 추구한다. 

 

영화 [존 윅 시리즈]에서는 총 사용의 예술미에 압도당한다. 온라인 게임상의 인물들이 파리같이 죽아 나가는 것처럼 이들 영화에서도 인간은 한 낱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잭 리처]에서는 저격용 총은 나오지만 칼이나 총이 주인공은 아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부분의 육탄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존엄성은 주인공과 주인공과 관련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권이다. 영화에서만 그러하다는 뜻이다. 

 

[잭 리처]는 살인 누명을 쓴 저격수의 누명을 잭 리처가 벗겨주는 과정을 다룬다. 아니다. 법망을 빠져 나갈까봐 감시를 한 것이라고 봐야겠다. 감시를 하다보니 오히려 무죄를 밝히게 된 영화이다. 사건을 수사하여 옳고 그름을 밝혀놓고 법적인 문제 등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홀연히 떠난다. 그는 바람 같은 존재이다. 

누명을 벗 게 된 자가 말한다. 

 

He doesn't care about the law.

He doesn't care about the proofs.

He only cares about what is right.

 

증거물을 변호사가 다 발견하게 해놓고 홀연히 떠난다. 

 

영화의 내용도 재밌고 구성도 좋다. 한 마디로 볼 만한 영화다. 한 사람을 살인하기 위해 다섯 명을 무작위로 죽이고 그것을 저격수에게 누명을 씌우는 구조다. 그 한 사람은 왜 죽어야 했는가. 인간의 욕망 충족이 그 배경인 것은 말해 무엇하리오. 현대물이니. 부패경찰과 폭력 대행은 당연히 나오는 것이고. 

 

오늘의 포인트는 이 것이다. 

남자는 희한한 동물이다.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에도 가끔 있기는 하다만). 아니 희한한 종족이라는 느낌을 준다. 많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잴 리처에서도 등장한다. 마지막에 총 1방으로 악당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총을 버리고 육탄전을 벌인다. 

 

왜 그런 구조를 쓸까?

그 1방을

다리에 쏘면 상대는 법정행이고, 머리나 심장에 쏘면 그 자리에서 응징된다.

그런데 왜? 총을 던져놓고 육탄전을 벌리는 것일까? 어떤 때는 그 육박적의 길이가 매우 길기도 하다. 총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총알이 있음에도 왜?

 

상대가

악당이지만 대단해서 죽이기 아까운 인물이거나, 오랜 악연으로 얽혀있거나, 혹은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악랄함을 보였거나, 법적인 심판을 받더라도 그 법이 때로 제 역할을 못하기도 하니까. 나중에 받게 될 법만으로 성이 안 차서.

 

내린 결론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응어리를 푸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영화를 두 시간씩 이끌어 오면서 악행을 저지른 그 자가 1방에 죽어버리면 우리의 뇌가 영화가 주는 교훈을 정리할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악당과 대화를 통해 영화의 줄거리도 일깨워 주면서, 상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과정, 그래서 영화 속의 주인공은 악당에게 응징이나 복수도 하지만 복수 전에 응어리를 풀고, 영화 관람자인 우리는 "평범한 인간"을 억울하게 대한 악인에 대하여 느끼던 불편함과 억울함을 해결하는 [응어리를 풀기 위한 시간]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나는 결론을 내 보는 것이다. 

폭력만 난무하다가 갑자기 끝나버리면 허망하지 않겠는가. 여운으로 마무를 한다고 해야할까.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악을 도구삼아 선을 익히는.

그렇게 해석을 해 본다.

 

[플러스]

고색창연한 사찰을 떠올려보자. 사찰의 입구부터 일주문까지의 걷는 길과 시간, 그리고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의 길과 시간. 불교적 의미를 배경에 깔고 지어진 사찰구조이다. 내가 높게 사는 것은 그 입구의 길이다. 

 

그 사찰이 있는 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일주문까지의 시간과 걷기는 속세로 부터 정신의 영영으로의 뇌의 작용을 전환시키는 시간인 것이다. 능동적이지 않아도 그 길을 걷기만 하면 속세와 불계의 경계를 자연스레 넘게 되는 것. 

 

영화의 마지막 육탄전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영화의 내용을 잘 음미하고 정리하시라. 그리고 영화에서 현실로 편안히 가시라. 그렇지 않다면 영화관을 나서서 우리 뇌는 되새김질하듯이 영화가 주는 의미를 다시 정리를 할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기에.

 

산입구에서 일주문까지 그리고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의 길이 긴 사찰을 더 좋아한다. (사진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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