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와 수기 기록: 가족들의 손 글씨 흔적]
어쩌다 보니 정여사가 관리를 할 일들을 전설이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정여사의 아들들은 고등학교부터 집을 떠나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영원히 집을 떠났다. 정여사와 전설만이 남게 된 집에는 이것저것 어린 시절이 묻어 있는 아들들의 물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장가를 갈 때면 다시 집에 와서 자신의 물건들을 가져갈 만도 하건만( 보통은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의 안식처가 마련되었을 때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챙겨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형식이 없었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를 곰곰 생각해보니, 첫째는 고등학교부터 집을 떠났으니 딱히 자신의 물건이 남아 있을 게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자의 방이 있는 주거 형태였으면 사람은 떠나도 그 공간과 사용하던 물건이 남게 되는데, 우리는 자신들의 방이 따로 없었고 물건도 다 공용이니 챙길게 없는 것이다. 집 떠난지 오래이니 남아 있던 것이라도 이제는 거의 정리가 되고 아들 소유의 것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다.
최종적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중고등학교 때 받은 상장들과 성적표였는데, 그냥 버리는 것은 아쉽고 기념으로 파일북을 사서 각자의 파일에 분류하여 꽂았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 파일북을 전해주었다. 버리건 추억에 잠기건. 물론 전설의 파일 북도 있다. 삼 남매가 상장을 많이 받았다. 도배를 하면 한 벽은 충분히 도배를 하겠는데...
그렇게 정리를 하다가 드디어 산다고 바빴던 시기에 그냥 넣어두었던 상자를 꺼내어 본다.
전설은 이렇게 글을 적는 것을 좋아한다. 펜으로 종이에 글쓰는 것도 좋아한다.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도 사랑한다. 글로 표현된 것들을 대체적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글씨를 써 놓은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학생 때의 노트를 다 버리고 없는 게 신기하다. 왜 버렸지.
그렇게 서류박스를 살펴보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1. 선친이 적어놓은 우리 가족들의 생년월일. 양력과 음력을 적어놓았고. 심지어 단기력도 적혀있다. 태어난 해 + 2333년. 이름과 생년월일을 한자로 적어 놓으셨는데, 펜글씨이다. 만년필이거나 펜인데 아마도 펜인 듯하다. 그 시절에는 펜글씨를 많이 썼다. 회사 경리부에서 사용하던 입출고 장부에 적은 것을 한 페이지 잘라 온 듯하다. 수십 년이 흘렀는데 변함없이 그대로. 선친과의 추억이 되었다.
2. 정여사는 의외로 글씨를 남겨 놓은게 없을 수 있겠다 싶어서, 한 10년 전부터 몇 개를 챙겼는데, 정여사가 스스로 취입한 트로트 가사를 적은 달력, 트로트 노래의 제목만을 적은 수첩. 그리고 며칠 전에 적어 보라고 한 우리 가족의 이름들. 생각보다 정여사의 글이 제법 있다.
2021.02.28 - [우리 정여사] -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 정여사의 트로트 사랑
3. 정여사는 아들이 둘인데, 고등학교부터 집을 떠난 큰 아들과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집을 떠난 아들이 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집을 영원히 떠났는데, 그때 당시로 집에 전화가 없었다.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집에 소식을 전하려면 편지를 써야 했다. 편지가 오면 전설이 정여사에게 읽어주는 것이다. 전설에게 편지를 썼다. 정여사가 읽지는 않을 것이라서. 전설에게 쓰고 정여사에게 요구사항이 있으면 전해주고 잘(?) 말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연애소식이라도 전할라치면 10장도 되었다. 어떤 때는 앞 뒤로도 적고. 편지 봉투가 제법 두툼했었다.
그 편지들을 아직 소장하고 있다. 아들들은 글씨체가 좋았다. 긴긴 사연이 좋았고, 뭔가 돈이라도 필요할 때면, 구구절절이 그 깊은 이유를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객지 생활의 어려움이나 일상적인 사연들을 적어 보내왔다. 전설은 이런 글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4. 전설 자신의 글은 남아있을까? 학교 다닐 때의 노트는 없다. 집이 습도가 높아서 노트들과 책이 다 상해서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아있는 것은 한글로 된 것은 일기장. 영어로 된 것은 유학할 때 수업시간의 필기 노트가 남아있다.
2021.03.10 - [순간에서 영원으로/Serendipity] - 지성의 고백은 전설의 글쓰기를 잉태하고
[플러스] 가족이외의 손글씨 흔적들도 있다.
5. 한 묶음이 더 있는데, 이것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주고 받는 크리스마스 카드 등이다. 초등학교 때의 것도 있다. 카드를 펼치면 한 줄짜리 "메리 크리스마스". 혼자 보며 웃는다. 파일 상자에 있고, 다시 읽진 않았다. 은퇴하면 읽어보고 버릴까 하고 있다.
유학시절에 친했던 후배가 준 크리스마스 카드도 있는데, 그 때는 전자 카드가 대세였는데, 굳이 카드를 사서 깨알같이 속을 채워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아직도 보관 중이다.
6. 지도교수들의 격려편지도 아직 가지고 있다. 이 것은 작년 이사때 발견한 것이다. 손으로 그 사람이 진심을 담아 적은 글과 글씨가 있는 종이를 전설은 감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후배카드를 사진 찍으려고 파일북을 여니 격려편지도 눈에 들어온다. 자상한 지도교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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