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꼬리. 소외. 브로콜리]
재래시장을 늘 지나온다. 버스에 내려서 환승을 하자면 재래시장 깊숙이 한 바퀴를 돌게 된다. 부식 거리도 사고 시장도 구경하고 명절 전후의 분위기도 느껴보고. 재래시장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바로 그 현장이다. 그 시장에서 삶의 기반을 일구는 사람도 삶의 현장이고 부식거리를 구매하는 사람도 바로 살아있는 사람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니.
외국에 여행을 가더라도 사람들은 늘 재래 시장을 가보라고 하질 않나. 재래시장은 볼 것도 많고 과일도 싸고. 숙소에 들고 와서 먹는 과일. 푸지게 먹을 수 있다. 적은 돈 들여. 그게 아니라도 그 나라 사람들을 호흡해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오늘은 한 구역 빨리 내려서 훓으면 오는데 할머니의 채소 좌판에 종이에 쓴 가격표를 보았다.
감자 3000원, 고구마 3000원, 가지 2000원. 보리꼬리 2000원.
에잉. 보리꼬리. 이게 뭐지. 요즘은 외국산 채소나 과일이 많아서 내가 아직 숙지하지 못한 것도 많은지라 겸손하게 무슨 물건인가를 살펴보는데. 아뿔싸 "브로콜리"였다.
저 좌판 할머니는 어쩌면 한글을 모를지도 몰랐다. 그러나 삐뚤뻬뚤 적힌 것으로 보아 할머니가 직접 쓴 글인듯하니 한글은 깨친 것 같다. 그러나 저 할머니 평생에 "브로콜리"가 활자화된 것은 절대로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들리는 대로 보리꼬리가 확실했기에 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다시 확인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소신껏 적어 놓은 [보리꼬리]를 보면서 몇 년 전 광안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로 이태원 거리도 아닌데 간판이 영어로 된 것이 많았다. 영어를 우리말로 적어 놓은 것도 있었고 우리말 없이 아예 영어 그 자체로 된 간판이 많았다.
옆에 정여사와 동행중이었던 지라 그녀에게 물었다. 저 간판들 읽을 수 있겠냐고.
80세쯤이던 그녀는 웃었다. 우리말 읽기도 힘든데 무슨.
입장을 바꾸어 내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보자.
너무 갑갑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간판을 모르는 것도 그렇고 우리말로 읽은 들 의미가 와 닿지 않고. 물론 상점 주인은 그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할테니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문제의식도 있을 이유가 굳이 없고.
그러나 나의 마음은 불편했다. 이런 종류의 불편함은 개인이 감소해야 할 것이긴 하다. 그러나 이런 류 말고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실수. 혹은 세심하지 못해서 불러 일으키는 소외가 얼마나 많을까.
또한 시대라는 것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문화가 변화하는 것에 발 마추지 못하는 것도 일종의 소외가 아닌가. 인터넷 시대에 컴퓨터를 모르고 모바일 시대에 와이파이를 모르고. 영상물 시대에 유튜브를 모르고.
공기를 호흡하고 밥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하지 않아서 접근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소외의 순간은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할 수 있는 한은 주위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인류애를 가지고 살고 싶다. 정치인들은 더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신들의 직업이지 않은가.
비공개구혼/오늘의 별일/문화/소외/브로콜리/보리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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